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있다. 다만 그 사람보다, 그때의 내가 더 그리울 뿐이다.
들어가며 —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건축학개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의 영화입니다. 이미 지나간 첫사랑을 다시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지만,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그 시간 속 자신을 다시 만나는 영화죠. 이용주 감독은 첫사랑을 추억의 감정보다 ‘시간의 구조’로 다룹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누구에게나 익숙하면서도, 묘하게 낯섭니다. 다들 한 번쯤 경험했지만, 아무도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니까요.
세연(한가인)과 승민(엄태웅), 그리고 그들의 과거 속 서연(수지)과 승민(이제훈). 두 시점이 교차하며 흐르는 영화는 마치 오래된 다이어리처럼 느껴집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웃음이 나다가, 어느 순간 눈물이 나죠. 첫사랑이란 게 원래 그런 거잖아요. 기쁘고, 서툴고, 결국은 아픈 기억으로 남는 것.
첫사랑의 설계도
영화 속에서 승민은 건축학도입니다. 건물을 설계하듯, 그는 자신의 감정을 차근차근 쌓아올립니다. 하지만 첫사랑은 도면대로 지어지지 않죠. 그의 마음은 완성되지 않은 건축물처럼, 미완의 상태로 남습니다. 그것이 청춘의 순수함이자, 동시에 아픔이기도 합니다. 서연에게 다가가지 못한 순간, 그가 머뭇거리던 눈빛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말 한마디를 못 하던 그 장면이 오히려 사랑의 본질처럼 느껴졌어요. 사랑은 표현보다, 머뭇거림 속에서 자라니까요.
나중에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그 머뭇거림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마음의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둘은 서로를 보면서,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동시에 마주하고 있었겠죠.
시간이 만든 거리, 그리고 미안함
건축학개론의 진짜 주제는 ‘그리움’이 아니라 ‘시간’입니다. 사람은 변하고, 세상도 변하지만, 마음 한쪽에 남은 기억은 이상하게 그대로예요. 그래서 다시 만났을 때, 오히려 어색합니다. 예전처럼 웃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거든요. 이 영화는 사랑이 끝난 뒤 남는 ‘미안함’의 감정을 가장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승민이 서연의 집을 완성시키는 장면. 그곳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그들의 시간이 다시 연결되는 장소입니다. 벽과 기둥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마치 오래된 기억의 조각 같았어요. 그 장면에서 저는 이상하게 울컥했습니다. 사랑은 끝났지만, 그 추억을 ‘짓는’ 일은 여전히 현재형이었으니까요.
이용주의 연출 — 감정의 온도를 정확히 짓다
이 영화의 미덕은 ‘절제’입니다. 과장된 대사도, 자극적인 사건도 없습니다. 대신 배우들의 표정과 공간이 감정을 말해줍니다. 감독은 사랑의 감정을 ‘공간’과 ‘소리’로 표현하는 데 탁월합니다. 음악, 바람, 빗소리, 그리고 고요. 이런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장면을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영화 전체가 한 편의 긴 회상처럼 흘러갑니다. 관객은 마치 자기 기억을 더듬는 기분으로 영화를 보게 됩니다.
특히 ‘기억의 집’이라는 설정은 너무나 상징적입니다. 물리적으로는 완성된 건물이지만,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미완인 관계. 집을 완성하는 과정은 결국 서로를 향한 이해와 화해의 과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미소. 그건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시간의 수용에 가까웠어요.
기억에 남는 장면
제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과거의 두 사람이 함께 노래를 듣던 장면이었습니다. 가사 한 줄, 웃음 한 번, 눈빛 하나가 다 사랑이었죠. 단순하지만 진심이었던 그 순간들이, 오히려 세월이 흐른 뒤 더 선명해집니다. 사랑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기억 속에서 형태를 바꾸며 남습니다.
또 하나, 성인이 된 승민이 마지막으로 서연을 바라보던 장면. 그 눈빛엔 후회보다 감사가 있었어요. “그때의 우리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 말이 들리지 않아도 느껴졌습니다.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마음이 조용했습니다. 잊은 줄 알았던 여름의 냄새가, 다시 스쳐간 기분이었어요.
영화를 보고 난 후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의 추억을 빌려, 결국 ‘시간을 견디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사라지지만, 그 시간 속의 우리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이 지금의 우리를 만든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 영화는 잊히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예전 음악을 다시 들었습니다. 그 시절의 감정이 다시 스며들더군요. 그건 슬픔이 아니라, 조용한 위로였습니다. 건축학개론은 그런 영화입니다. 잊힌 줄 알았던 자신과 다시 마주하게 만드는 이야기. 그리고 그 마주함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주의: 본 글은 개인적인 감상과 해석에 기반한 리뷰이며, 영화의 내용과 감정의 해석은 관객의 시선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