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침묵했고, 인간은 울었다. 그 눈물 속에서 어쩌면 진짜 용서가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들어가며 — 고요한 절망의 영화
밀양은 보고 나면 말이 잘 나오지 않는 영화입니다. 누군가 “좋았어요?”라고 묻는다면,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름답다고 하기엔 너무 잔인하고, 슬프다고 하기엔 너무 조용합니다. 이창동 감독은 인간의 내면을 그렇게 잔잔하게 무너뜨립니다. 폭발하지 않고, 서서히 무너지는 방식으로요. 저는 영화를 다 보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그 침묵이, 어쩌면 감독이 의도한 감정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속 신애(전도연)는 남편을 잃고 아이와 함께 밀양으로 이사 옵니다. 새로운 시작처럼 보였죠.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는 모든 걸 잃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얻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조차 무너집니다. 밀양은 그런 영화예요. 잃고, 찾고, 다시 잃는 이야기.
믿음이라는 이름의 위로
신애는 아이를 잃은 뒤 완전히 무너집니다. 그 고통 속에서 종교를 찾죠. 교회 사람들은 그녀에게 ‘신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나마 살아 있을 이유를 찾습니다. 하지만 그 위로는 너무 쉽게 무너집니다. 진짜 위로는 신에게서 오지 않고, 인간의 마음에서 와야 한다는 걸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애가 교회에서 눈물을 쏟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건 기도의 눈물이 아니라 절규에 가까웠어요. 그녀는 신에게 묻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죠?” 하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신은 침묵하고, 세상은 그대로입니다. 그때부터 이 영화는 종교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신앙’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용서
영화 후반부, 신애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찾아갑니다. 그 장면이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그녀는 그를 직접 마주하고 용서하려 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를 용서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하려 했던 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순간, 범인은 이미 ‘신에게 용서받았다’고 말하죠. 그 말이 너무 잔인했습니다. 그녀에게서 용서의 주체가 사라진 순간, 신애의 믿음도 함께 무너집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볼 때, 몸이 굳었습니다. 진짜 용서란 무엇일까. 용서란 누가 누구에게 베푸는 걸까. 신애는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짓지만, 그 미소는 완전히 부서진 웃음이었습니다. 그게 인간의 얼굴이었어요. 무너진 채로 남은 인간의 표정.
이창동의 시선 — 빛과 침묵의 언어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늘 조용합니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엔 너무 많은 말이 들어 있어요. 밀양의 카메라는 인물을 위로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봅니다. 신애가 들판에 주저앉아 울던 장면,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는데도 세상이 완전히 어두워 보였죠. 그 대비가 이창동 영화의 언어입니다. 빛이 곧 절망이고, 어둠이 오히려 진실이 되는 세계.
영화의 제목 ‘밀양’은 순우리말로 ‘밝은 햇살’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영화 속의 밀양은 어둡습니다. 그건 역설이죠. 감독은 우리에게 묻는 듯합니다. “당신에게 밝음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입니까, 사랑입니까, 아니면 단지 환상입니까?”
기억에 남는 장면
저는 마지막 장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신애가 거울 앞에서 머리를 자르는 장면. 그건 재생의 제스처 같기도 하고, 포기의 표시 같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믿지 않지만, 그렇기에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그 장면에서 묘한 평온함이 느껴졌습니다. 절망의 끝에서 찾아온 가장 인간적인 평화.
전도연 배우의 얼굴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영화였습니다. 그녀의 눈빛은 울지 않아도 울고 있었어요. 감정이 과하지 않아서 오히려 진짜처럼 느껴졌습니다. “용서란 결국 자신을 위한 행위”라는 말을, 이보다 더 고통스럽게 보여준 영화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밀양은 ‘믿음’과 ‘용서’를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인간의 한계’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신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결국 믿고 싶은 건 자신이죠. 신애는 신을 통해 구원받고 싶었지만, 끝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구원은 실패했지만, 그 실패 안에서 진실이 피어났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저는 조용히 창밖을 봤습니다. 빛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차갑더군요. 그래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란, 어쩌면 끝없는 용서의 시도를 반복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요. 밀양은 그 시도의 기록처럼 남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이 오래도록 마음속을 밝힙니다.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히.
주의: 본 글은 개인적인 감상과 해석에 기반한 영화 리뷰이며, 영화 속 인물과 사건에 대한 해석은 관객의 시선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