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향해 외치던 그 한 사람의 절규. 너무 늦게서야 이해하게 된 말 한마디.
들어가며 — 영화보다 느린 시간
박하사탕은 제가 처음으로 ‘시간’이라는 개념을 무겁게 느꼈던 영화였습니다. 그냥 슬픈 영화가 아니라, 시간이 거꾸로 흐르면서도 그 안의 인물이 점점 무너지는 모습을 보게 되죠. 이상하죠. 시간이 뒤로 가는데, 사람은 점점 더 상처받아 갑니다. 이창동 감독은 시간을 되감는 형식을 빌려, 결국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영화의 첫 장면, 철길 위에서 “나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영호의 목소리는 마치 시대 전체를 향한 절규처럼 들렸습니다. 저는 그 순간 숨을 멈추고 있었어요. 단 한 문장이 이렇게 오래 남을 줄은 몰랐습니다.
거꾸로 흐르는 삶, 거꾸로 흘러간 시대
영화는 한 남자의 생을 20년 거슬러 올라가며 보여줍니다. 사진 동호회에서 시작해, 사랑, 군대, 경찰, 그리고 그 이전의 순수함까지. 장면마다 시간이 되감기는데, 그게 단순한 기술적 장치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치 “그때로 돌아가면 달라질 수 있을까”라는 인간의 간절함을 시각화한 것 같아요. 하지만 답은 명확합니다. 아니요, 달라질 수 없습니다. 시간은 되감아도, 상처는 되돌릴 수 없다는 잔혹한 진실.
영호가 청춘이었던 시절, 그 눈빛엔 아직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믿었고, 세상에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사회의 구조와 폭력이 그를 삼켜버립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미워했던 세상 그 자체가 되어버리죠. 그래서 영화가 끝이 아니라 시작에서 총소리가 터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건 끝의 폭발이 아니라, 삶의 무게에 대한 되돌릴 수 없는 ‘시작의 경고’였어요.
이창동의 연출 — 감정의 결 빛처럼 잡아내다
이창동 감독의 연출은 참 묘합니다. 과장되지 않은데 이상하게 벗어나질 않아요. 인물이 울지도, 크게 외치지도 않는데, 보는 사람은 마음이 무너집니다. 감정의 끝을 직접 보여주지 않으니까, 오히려 더 오래 남습니다. 그의 카메라는 인물을 따라가되, 절대 위로하거나 변명하지 않습니다. 그게 더 잔인하고, 동시에 더 진실하죠.
영화 속 빛의 톤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회색빛 하늘, 초록빛 산, 그리고 바래진 필름의 질감. 그 색들이 마치 인간의 마음처럼 닳아 있습니다. 특히 박하사탕 하나를 손에 쥔 채 멍하니 앉아 있던 장면. 그 작은 사탕 하나가 얼마나 큰 상징인지 그땐 몰랐어요.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건 순수함의 마지막 흔적이었어요.
기억에 남는 장면들
저는 영화 후반부, 어린 시절 영호가 순임을 바라보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 침묵이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때의 그는 아직 ‘누구도 해치지 않은 인간’이었죠.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쩌면 그는 총 대신 카메라를 들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총을 쥐여줍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인생은, 이미 정해진 비극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나 돌아갈래.” 그 대사는 단순한 후회가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 한켠에 갖고 있는 미안함, 부끄러움, 그리고 다시는 닿을 수 없는 순수함에 대한 그리움의 고백이에요.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모르게 제 안에도 돌아가고 싶은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박하사탕은 여전히 제 마음 어딘가를 눌러놓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빨라져도, 인간의 상처는 여전히 느린 속도로 흘러가니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묘한 죄책감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영호일지도 모르니까요. 누군가를 해치고, 또 미워하면서도, 그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 그게 어쩌면 이창동 감독이 말하는 ‘인간’일 겁니다.
영화가 끝나도 그 목소리가 귀에 남습니다. 나 돌아갈래. 그건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다시는 잃고 싶지 않은 어떤 마음으로의 귀환이 아닐까요. 저는 그 말이 아직도 아픕니다. 그래서 박하사탕은 다시 보기 힘든 영화지만, 그만큼 오래 남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주의: 본 글은 개인적 감상과 해석에 기반한 영화 리뷰이며, 실제 인물이나 사건과는 무관합니다. 내용은 필자의 주관적 인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