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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2018) — 사라진 사람들, 남겨진 불씨 그리고 불안의 시대

by 리뷰대디 2025.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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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환상일까. ‘버닝’은 그 질문을 끝내 풀지 않는다. 그게 오히려 더 현실 같다.

들어가며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모든 게 흔들렸다

버닝을 처음 봤을 때, 이상하게 조용했습니다. 큰 사건도 없고, 음악도 절제되어 있는데도 마음이 불안했어요. 뭔가가 계속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었죠. 이창동 감독은 이번엔 ‘부재’로 이야기를 만듭니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방식이죠.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도대체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 건지 계속 궁금했습니다. 사람? 진실? 혹은 우리 자신?

영화가 끝나고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어요. 설명되지 않는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납득이 됩니다. 마치 현실도 그런 것처럼요. 다 보고 나면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 묘한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세 인물의 미묘한 거리

종수, 해미, 벤. 세 사람은 한 공간에 있지만, 절대 만나지 않습니다. 같은 언어를 쓰지만,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같아요. 그 거리감이 이 영화의 전부입니다. 종수는 작가가 되고 싶지만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해미는 사라져버리고, 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유한 인물로 남죠. 세 사람의 대화는 마치 다른 주파수를 듣는 것처럼 어긋납니다. 그리고 그 어긋남이 어느 순간 폭력으로 변합니다.

저는 벤이라는 인물이 참 무섭게 느껴졌어요. 그가 실제 범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태도, 그의 무표정, 그리고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대사. 그 말이 주는 공허한 냉기가 이상하게 오래 남아요. 아무 감정도 없는데, 모든 걸 파괴할 수 있는 사람. 그게 지금 시대의 ‘괴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사라지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현실

영화는 해미의 실종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그 실종은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상징이죠. 이창동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이야기합니다. 사회 속에서 잊히고, 기록되지 않고,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들. 그게 해미고, 종수고, 어쩌면 우리일지도 모릅니다. 벤이 상징하는 건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의 냉정함이에요. 그는 아무 죄책감 없이 “재미있잖아요”라고 말하죠. 그 말이 참 섬뜩했습니다. 아무 일도 아닌 듯 타인을 지워버리는 태도. 그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처럼 느껴졌어요.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불’이 마음에 걸립니다. 불은 파괴이자, 동시에 증거이기도 하죠. 하지만 영화 속 불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타오른 자국조차 사라집니다. 불이 아니라, 불씨만 남아요. 그리고 그 불씨는 관객의 마음 속에서 천천히 번집니다.

이창동의 연출 — 말 없는 폭력의 리듬

이창동 감독의 연출은 늘 느립니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는 견디기 힘든 긴장감이 있습니다. 인물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공기 속에서 이야기가 피어오릅니다. 그는 단 한 컷도 낭비하지 않습니다. 모든 장면은 의미를 품고, 모든 침묵엔 감정이 들어 있습니다. 특히 종수가 담배를 피우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장면. 그건 분노도, 슬픔도 아닌, 무력감의 표정이었어요. 현실을 이해하려 애쓰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얼굴.

후반부의 결말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폭발적입니다. 종수가 벤을 마주보며 칼을 들 때, 저는 그게 복수인지, 해답인지, 혹은 자멸인지 구분이 안 됐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습니다. 그 순간 종수는 드디어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잊혀지지 않으려면, 타오를 수밖에 없는 시대의 인간. 그 비극이 너무 현실 같아서, 오랫동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버닝은 ‘설명되지 않음’의 미학입니다. 끝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신할 수 없죠. 하지만 이상하게 그게 더 진실 같습니다. 세상엔 이유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도 있고, 이유 없이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이창동 감독은 그 불안을 한 장면, 한 호흡씩 보여줍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믿고 있나요?”

이 영화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립니다. 꿈속 같지만, 너무 현실적입니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이 오래 남아요. 불이 타오르고, 연기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건 결국 ‘인간’이라는 흔적 하나뿐입니다. 저는 그게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불씨 — 그게 우리 마음 속의 현실입니다.

버닝은 끝나도 계속 타오릅니다. 화면이 꺼지고 나서도, 마음 어딘가에서 작은 불빛이 남아요. 그 불빛이 꺼지지 않게, 우리는 오늘도 현실을 바라봅니다. 조금은 불안하게, 그러나 확실히 살아 있는 채로.

주의: 본 글은 개인적 감상과 해석에 기반한 리뷰이며, 인물과 사건에 대한 해석은 관객의 시선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