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그 장면을 아직도 분명히 기억합니다. 화면이 젖어 있고, 숨이 아주 조금 짧아지던 순간.
들어가며 — 첫 감정부터 적겠습니다
처음 봤을 땐요, 그냥 스릴러겠거니 했습니다. 연쇄살인, 형사, 쫓고 쫓기는 이야기. 그런데 보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버스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이 이상하게 낯설더라고요. 불이 꺼진 골목을 지나는데 바닥이 눅눅했습니다. 비가 온 것도 아닌데. 기분의 문제겠죠. 이 영화는 ‘범인을 찾는 이야기’보다 ‘우리가 무엇을 보며 살아왔는지’ 묻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조금 난감했어요. 끝났는데 끝나지 않은 것 같아서요.
영화의 분위기 — 칙칙한 흙빛, 그런데 괜히 아름다움
화면이 전반적으로 탁하죠. 흙, 풀, 낡은 사무실의 형광등, 먼지. 그런데 그 질감이 그냥 더럽거나 우울하게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뭔가 손에 잡힐 듯 현실적인데, 그 현실이 조금씩 뒤틀려 있달까요. 논두렁에 사람들이 서 있고, 어디선가 기차가 지나가며 소리를 남깁니다. 소리 자체가 장면을 밀어 올립니다. 그때 “아… 여기는, 우리가 아는 한국의 어떤 해.” 그런 느낌이 확 들어요. 리얼리즘인데, 기억의 톤으로 색을 바꿔 놓은 리얼리즘. 저는 그렇게 봤습니다.
배우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죠. 송강호의 표정이 말보다 빠르게 움직입니다. 대사가 없는데 상황이 들리는 순간들이 있어요. 윤성이 단단한 농기구 같은 얼굴로 웃다가 굳어질 때—그때 보는 사람도 같이 굳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웃긴 장면에서 웃다가 바로 멈춘 적이 많았어요. 웃음 뒤에 바로 냉기가 따라와서요. 그 ‘온도차’가 오래갑니다.
봉준호의 시선 — 시대를 비틀어 보여주는 방법
이 영화가 특별한 건, 사건의 디테일보다 그 사건이 가능했던 환경을 집요하게 보여주는 태도였습니다. 그 시대의 상명하복, 기록의 허술함, 체면이 진실을 덮는 일. “그땐 다 그랬지”로 넘겨버렸던 풍경을 카메라가 차분히 붙잡습니다. 그래서 더 불편합니다. 누구 하나 ‘절대 악’으로 몰지 않으면서도, 모두가 조금씩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장면들이 계속 나오니까요. 결국 시스템의 구멍—그 틈으로 어둠이 들어와 자리를 잡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증거가 날아간다”는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쳤습니다. 증거만 날아간 게 아니겠죠. 말, 명예, 사과, 사라진 시간…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그래서 클로즈업이 뜨거울 때가 많습니다. 땀, 흙, 찌그러진 의자 다리. 사소한 것들이 화면 정중앙으로 걸어 들어오죠. 보는 내내 자꾸 자세를 고쳐 앉게 됩니다.
기억에 남는 장면 — 대단히 사소한 말 한마디
“밥 먹고 합시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이상하게 울컥했습니다. 사건은 반복되고, 비는 또 오고, 실수도 이어지는데도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하잖아요. 그게 좀 슬펐어요. 아무 일 없다는 듯 밥을 뜨는 손… 그 손이 어쩐지 떨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문장 하나가 ‘살아내는 일’을 말하더군요. 대단한 각오보다, 그냥 버티는 감각.
또 하나, 마지막 장면. 다들 아시죠.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는 눈. 저도 모르게 숨이 멎었고, 화면이 어둡게 꺼진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못 일어났습니다. 그 눈빛은 “범인이 누구냐”보다 “너는 뭘 보고 있었니?”에 가까웠어요. 약간 부끄러워졌습니다. 영화를 보면서도 저는, 어쩌면 쉬운 답만 찾고 있었던 건 아닌가. 범죄 장르의 쾌감 같은 것을 기대했는데, 여기선 계속 불편한 질문만 돌아오니까요.
장르의 틀을 살짝 벗어나는 순간들
추격과 조사, 고문과 자백, 경찰 조직의 균열. 이 모든 게 장르 영화의 문법을 따르는데, 봉준호는 문법을 사용하되 거기에 안착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긴장감이 최고조로 올라야 할 장면에 엉뚱한 유머가 끼어들거나, 분노가 폭발하는 순간에 화면이 멀찍이 서서 사람들을 내버려 둡니다. 가까이 다가갈 것 같다가—한 발 물러서는 그 동작. 거기가 이 영화의 정체성 같아요. 관객을 붙잡지도, 풀어주지도 않죠. 그냥 묻습니다. “이 장면, 당신은 어떻게 보나요?”
보고 난 뒤 — 지금 우리에게 남는 말
시간이 꽤 흘렀지만, 저는 가끔 이 영화를 다시 틀어 놓습니다. 사건의 해답을 찾으려는 마음 때문은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어떤 표정 하나가 떠오를 때가 있어서요. 그러면 그 표정을 확인하러 돌아갑니다. 그리고 또다시 비슷한 지점에서 멈춥니다. “우리는 진실을 볼 준비가 되어 있었나.” 글쎄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 작품은 작은 용기를 줍니다. 답을 알지 못해도 질문을 붙들 수는 있겠구나, 하는 마음. 누군가의 실수, 체제의 허점, 부족한 기록. 그런 것들이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게 하는 힘—그게 질문에서 시작한다면, 이 영화는 이미 제 할 일을 다 한 거겠죠.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이야기.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이어 쓰는 후일담.
마치며 — 독자님께
혹시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마음이 조금 한가한 밤에 틀어 보시죠. 불을 다 끄고요. 휴대폰은 멀리. 그리고 어느 순간, 누군가의 시선이 정면에서 걸어 들어올 때—그때 잠깐 멈춰 서 보세요. 그 눈이 누구의 것인지, 저도 아직 모릅니다. 다만 저는, 그때 제 숨소리가 조금 커진다는 것만은 확실히 압니다. 그 작은 소리가, 이상하게 오래 남습니다.
주의: 본 글은 개인적 해석과 감정에 기반한 리뷰입니다. 사실 판단이나 법적 해석이 아닌, 관람 경험에서 비롯된 인상과 사유를 기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