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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010) — 잊혀가는 세상 속, 마지막으로 남은 한 줄의 시

by 리뷰대디 2025.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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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사라져도, 마음에 남는 문장 하나가 있다면 그것이 삶 아닐까. ‘시’는 그렇게 속삭였다.

들어가며 — 너무 조용해서 아픈 영화

는 참 이상한 영화입니다. 큰 사건도 없고, 음악도 절제되어 있고, 배우의 표정조차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서서히 저려옵니다. 이창동 감독은 이번에도 삶의 잔잔한 표면 아래, 인간의 부끄러움을 들여다봅니다. 그는 어떤 거대한 드라마보다, 침묵 속에 숨어 있는 감정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영화는 그 믿음으로 쓰인 시 한 편 같습니다.

주인공 미자(윤정희)는 여든을 바라보는 평범한 노인입니다. 손자를 돌보며 살아가는, 어쩌면 누구의 엄마나 할머니일 수 있는 사람. 그런데 그녀의 일상에 ‘시’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녀의 삶은 아주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시를 배우는 사람, 죄를 끌어안은 사람

미자는 구청 문화센터에서 시 쓰기 강좌를 듣습니다. 처음엔 그저 취미로 시작했을 뿐이죠. 하지만 그녀의 삶은 이미 시가 필요한 시점에 와 있었습니다. 알츠하이머로 기억이 흐려지고, 세상은 점점 잔인해집니다. 게다가 손자가 저지른 끔찍한 사건이 그녀를 무너뜨리죠. 이창동은 시를 ‘구원’의 언어로 사용하지만, 그 구원은 결코 달콤하지 않습니다.

미자는 시를 쓰면서 삶을 바라보는 눈을 배우지만, 동시에 자신이 그동안 외면해온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아름다움을 배우는 일은 결국 아픔을 인식하는 일이라는 걸, 그녀는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꽃을 바라보던 시선이, 어느 순간 죄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바뀌는 장면. 그 장면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요. 그것이 인간의 성숙이라면, 그 성숙은 너무나 잔인합니다.

아름다움과 죄의 공존

는 아이러니로 가득 찬 영화입니다. 카메라는 늘 햇살이 비치는 풍경을 담는데, 그 속의 인물들은 점점 어두워집니다. 밝은 빛이 오히려 죄를 드러내죠. 미자는 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지만, 그 시선 끝에는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아름다움’은 결코 도피의 장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실을 직면하게 만드는 잔혹한 거울이죠.

손자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돈을 모으는 장면에서, 미자는 한없이 무력해 보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으려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것이 죄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 죄책감이 그녀의 시 속으로 스며듭니다. 그래서 그녀가 마지막에 쓴 시는, 사실 ‘고백문’에 가깝습니다. 세상에 대한 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의 문장이죠.

윤정희의 얼굴, 이창동의 카메라

윤정희 배우의 얼굴은 이 영화 전체를 설명합니다. 말보다 표정, 눈빛보다 숨결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미자의 얼굴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존엄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약하지만, 완전히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창동은 그런 인간을 너무 잘 압니다. 그는 절망을 찍으면서도, 항상 끝에 희미한 희망을 남깁니다. 그게 이 영화가 잔인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 카메라가 천천히 물가로 이동하면서 들리는 미자의 목소리. “그대는 어디에 있나요.” 그 목소리는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 같습니다. 잊혀져 가는 이름, 사라져가는 인간의 흔적. 그걸 붙잡기 위해 그녀는 시를 썼던 게 아닐까요.

영화를 보고 난 후

를 보고 나면, 세상이 조금 달라 보입니다. 평범했던 사물들이 갑자기 낯설고, 그냥 스쳐 지나던 풍경에 마음이 머뭅니다. 저는 영화가 끝난 뒤 한동안 말을 잃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이 영화에 대한 예의 같았어요. 이창동 감독은 ‘아름다움’이란 결국 고통을 인식하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 고통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시를 쓰게 되죠. 시는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견디기 위해 필요한 언어입니다.

미자의 마지막 시는 슬프지만 이상하게 따뜻합니다.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사라졌지만, 그 목소리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시는 그렇게 존재하는지도 모릅니다. 사라진 사람의 흔적이자, 남겨진 사람의 위로로. 는 그걸 가장 고요한 방식으로 전합니다. 결국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한 줄의 문장을 남기는 존재입니다.

주의: 본 글은 개인적 감상과 해석에 기반한 영화 리뷰이며, 영화 속 인물과 사건의 의미는 관객의 시선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