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21

시 (2010) — 잊혀가는 세상 속, 마지막으로 남은 한 줄의 시 모든 것이 사라져도, 마음에 남는 문장 하나가 있다면 그것이 삶 아닐까. ‘시’는 그렇게 속삭였다.들어가며 — 너무 조용해서 아픈 영화시는 참 이상한 영화입니다. 큰 사건도 없고, 음악도 절제되어 있고, 배우의 표정조차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서서히 저려옵니다. 이창동 감독은 이번에도 삶의 잔잔한 표면 아래, 인간의 부끄러움을 들여다봅니다. 그는 어떤 거대한 드라마보다, 침묵 속에 숨어 있는 감정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영화는 그 믿음으로 쓰인 시 한 편 같습니다.주인공 미자(윤정희)는 여든을 바라보는 평범한 노인입니다. 손자를 돌보며 살아가는, 어쩌면 누구의 엄마나 할머니일 수 있는 사람. 그런데 그녀의 일상에 ‘시’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녀의 삶은 .. 2025. 10. 9.
밀양 (2007) — 용서할 수 없는 용서, 그 끝에서 피어난 희미한 빛 신은 침묵했고, 인간은 울었다. 그 눈물 속에서 어쩌면 진짜 용서가 시작됐는지도 모른다.들어가며 — 고요한 절망의 영화밀양은 보고 나면 말이 잘 나오지 않는 영화입니다. 누군가 “좋았어요?”라고 묻는다면,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름답다고 하기엔 너무 잔인하고, 슬프다고 하기엔 너무 조용합니다. 이창동 감독은 인간의 내면을 그렇게 잔잔하게 무너뜨립니다. 폭발하지 않고, 서서히 무너지는 방식으로요. 저는 영화를 다 보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그 침묵이, 어쩌면 감독이 의도한 감정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영화 속 신애(전도연)는 남편을 잃고 아이와 함께 밀양으로 이사 옵니다. 새로운 시작처럼 보였죠.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는 모든 걸 잃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얻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조차.. 2025. 10. 9.
친절한 금자씨 (2005) — 복수의 끝에서 피어오른 연민의 얼굴 그녀는 친절했고, 또 잔인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인간이었습니다.들어가며 — 차가운 복수, 이상하게 따뜻한 여운친절한 금자씨를 처음 봤을 때, 마음이 조금 혼란스러웠습니다. 잔혹한 복수극인데, 이상하게 따뜻하더군요. 피가 흐르는데 눈물이 먼저 나왔어요. 이게 대체 무슨 감정인가 싶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감정을 비틀지만, 그 속엔 여전히 인간이 남아 있습니다. 금자씨의 미소는 차갑고, 그녀의 눈빛은 따뜻했습니다. 그 모순이 이 영화의 전부입니다.13년의 감옥살이 끝에 세상으로 나온 금자. 그녀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금자씨’로 불립니다. 케이크를 구워주고, 사람을 돕고, 미소를 짓죠. 그런데 그 웃음 뒤엔 오랫동안 눌러둔 분노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미소가 불안했어요. 웃고 있지.. 2025. 10. 9.
마더 (2009) — 사랑이라는 이름의 광기, 그 끝에서 남은 어머니의 그림자 사랑은 선일까요, 아니면 죄일까요. ‘마더’를 보고 난 후 그 경계가 영원히 흐려졌습니다.들어가며 — “엄마는 모든 걸 할 수 있어요”마더를 처음 봤을 때, 마음이 꽉 막혔습니다. 잔인한 장면보다 무서웠던 건, 그 안에 담긴 ‘진짜 사랑’이었어요. 세상 어떤 공포보다도 강한 감정이죠. 봉준호 감독은 이번엔 사회를 비판하지 않고, 인간의 본질을 해부합니다. 그중에서도 ‘모성’이라는 이름의 그림자를 가장 냉정하게 보여줍니다. 보고 나면 묘하게 조용해지지만, 그 조용함 속에 깊은 균열이 남습니다.“엄마는 널 믿어.” 단순한 대사인데, 그 안엔 폭풍이 숨어 있었어요. 믿음이 사람을 살릴 수도 있지만,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걸, 이 영화는 너무도 차분하게 보여줍니다.어머니의 사랑 — 눈먼 확신의 온도주인공 ‘엄마.. 2025. 10. 9.
박하사탕 (1999) — “나 돌아갈래” 그 한마디가 남긴 시간의 무게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향해 외치던 그 한 사람의 절규. 너무 늦게서야 이해하게 된 말 한마디.들어가며 — 영화보다 느린 시간박하사탕은 제가 처음으로 ‘시간’이라는 개념을 무겁게 느꼈던 영화였습니다. 그냥 슬픈 영화가 아니라, 시간이 거꾸로 흐르면서도 그 안의 인물이 점점 무너지는 모습을 보게 되죠. 이상하죠. 시간이 뒤로 가는데, 사람은 점점 더 상처받아 갑니다. 이창동 감독은 시간을 되감는 형식을 빌려, 결국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영화의 첫 장면, 철길 위에서 “나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영호의 목소리는 마치 시대 전체를 향한 절규처럼 들렸습니다. 저는 그 순간 숨을 멈추고 있었어요. 단 한 문장이 이렇게 오래 남을 줄은 몰랐습니다.거꾸로 흐르는 삶, 거꾸로 흘러간 시대영화는 한.. 2025. 10. 9.
기생충 (2019) — 웃음과 불편함 사이, 우리가 사는 집의 단면 웃긴데, 불편했습니다. 너무 잘 만든 영화인데 이상하게 숨이 막혔어요.들어가며 — 웃음 뒤에 남은 건기생충은 처음엔 그냥 풍자극처럼 시작하죠. 반지하의 냄새, 피자박스 접기, 와이파이를 훔쳐 쓰는 일상. 그런데 웃고 있는 사이에, 영화는 이미 우리 발밑의 땅을 천천히 뒤집고 있습니다. 그게 이 영화의 무서운 점이에요. 웃으면서 불편해지고, 불편하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솔직히 처음 봤을 때는 “이게 이렇게까지 세계적으로 통할까?”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끝나고 나니, 국적이 필요 없는 감정이더군요. 부와 가난, 위층과 아래층, 선과 악의 경계가 한 집 안에서 공존한다는 설정이 너무나 정확했어요. 우리 사회의 모양을 빼다 박은 듯해서요.계단, 냄새, 그리고 눈높이영화의 공간 구성이 정말 정교하죠. 반.. 2025. 10. 9.